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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러시아 여성 읊조린 시조 “낙환들 꽃이 아니랴 … ”-중앙일보[2012.08.10]

작성자 :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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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여성 읊조린 시조 “낙환들 꽃이 아니랴 … ”

[중앙일보]입력 2012.08.10 00:58 / 수정 2012.08.10 00:58

옛 시조집 『남훈태평가』 완역
상트페테르부르크대 강사

아나스타샤는 “신라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며 안압지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흰 달빛/자하문(紫霞門)/달안개/물 소리…’

 8일 경주 불국사 일주문을 지나며 한 러시아 여성이 박목월의 시 ‘불국사’를 읊는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동양학부 내 한국어 전공인 구리에바 아나스타샤(34) 전임강사. 국제교류재단(이사장 김우상) 주최,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연구소(소장 홍완석) 주관으로 열린 ‘러시아 교육자 한국학 워크숍’ 참석 중 불국사에 들렀다. 현대시만 잘 아는 게 아니다. 아나스타샤는 조선 말기의 순한글 시조집 『남훈태평가(南薰太平歌)』를 처음 러시아어로 완역한 주인공이다. 그의 한국말은 완벽한 수준이다.

 번역은 2002년 시작했다. 아나스타샤는 1995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 동양학부에 입학했다. 중국어를 할 수도 있었지만 “할 게 더 많은” 한국어를 일부러 택했다. 석사 때는 조선시대 가사(歌辭), 그 중에도 송강 정철의 작품에 흠뻑 빠졌다. 박사과정에서는 힘든 선택을 했다. 송강은 이미 1950년대 러시아어로 꽤 번역됐다. 아나스타샤는 “새 길을 개척하고 싶었다”고 했다. 2002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동양고서연구소에 보관 중인 1863년 목판본 『남훈태평가』를 집어 들었다. 시조 224수, 잡가 1개, 12가사 6개가 실린 이 목판본은 서양에 최초로 알려진 순한글 시조집이다. 극히 일부가 1895년 불어로, 1908년 일어로 번역됐을 뿐이다. 제대로 연구하려면 통째로 번역해야 했다.

 10년 고행이 시작됐다. 첫 어려움은 글자 판독. 목판본엔 날림체가 많아 글자를 하나씩 확인했다. 어디까지 한글이고 어디까지 한자인지 모를 때도 있었다. 한자를 낱말로 떼내 중·러, 중·일 사전을 뒤졌다. 그래도 오리무중일 때는 한국의 시조대사전, 시조 문학사전을 훑어 뜻을 알아냈다. ‘원’자를 ‘완’자로 쓰는 식의 오기도 많아 애를 먹었다. 2006년엔 국제교류재단의 지원으로 3개월 한국에 체류하며 도움을 받기도 했다.

 번역을 축적하며 아나스타샤는 『남훈태평가』를 주제로 20여 편의 논문을 썼다. 드디어 2011년 8월 번역이 끝났다. 목판본 출판 약 150년 만에 최초의 외국어 완역본이 러시아어로 탄생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그는 박사논문 ‘한국 고전 시조집 남훈태평가-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소속 동양고서연구소 소장본 중심으로’를 썼다. 지난 6월 예비 통과가 됐다. 가을쯤 최종 통과되면 번역본을 출판한다.
 
  그는 “한국 고대 소설 전문가인 아델라이다 트로체비치 교수, 한국 고대시문학 전공인 마리안나 니키치나 교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고 겸손해 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시조를 묻자 한 수 읊는다. “간밤에 부던 바람에 만정도화 다 지거다… 낙환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요.”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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